시간이 짓는 집, 시간이 사는 집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작가 이민경이 자신의 작업 세계의 전반(全般)을 정리하는 개인전을 개최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앞으로 많이 남아 있을 작업 세계를 펼치기 위한 중간 점검의 장이라는 점에서 작업의 전반(前半)을 정리하는 개인전이라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번 개인전의 주제는 “거기에 있지만 항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들에 대해”이다. 이 글은 작가가 제시하는 ‘거기’라는 지시대명사를 중심으로 그녀의 작업이 펼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간의 조형적 탐구를 분석하고 올해의 출품작들의 의미를 분석하고 해설하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후기인상주의 화가 고갱(P. Gauguin)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i sommes-nous? Où allons-nous ?)〉(1897)라는 작품의 제목을 화두로 삼고 글을 쓰기로 한다.

 

I.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출발이 ‘어디에서부터’였는지를 묻는다. 유목의 원시 시대에는 ‘신의 세계’라고 답할 지식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다만 두려움의 대명사인 ‘저기’를 어렴풋이 떠올릴 따름이었다. ‘저기’는 ‘공간상으로 먼 곳이자, 시간상으로 먼 근원적 과거’였다. 그렇다. 그것은 번개가 치는 ‘저기 하늘’이거나 폭풍우가 치는 ‘저기 땅끝’의 어딘지 알 수 없는 근원으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공포의 세계였다.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오늘의 추위와 내일의 비바람을 피할 ‘거기(시공간상 가까운)’라는 동굴과 숲속의 덤불과 같은 피신처, 즉 셸터(shelter)가 주요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주의 목적이 ‘유목’ 자체였던 원시인들에게는 그 셸터는 가꿈이나 돌봄의 대상이 되지 못한 임시방편적인 '유목의 기착지(寄着地)일 따름이었다. ‘거기’는 원시인들에게 그저 지천에 널려 있는 여러 개의 ‘떠도는 집’일 따름이었다. 이 떠도는 집은 그들에게 ‘작은 위안’이었으리라.

현대적 의미에서 유목을 지속하는 작가 이민경의 작업에서, 이 ‘떠도는 집’은 자신의 작업을 푸는 키워드가 된다. 그녀의 작가 노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그녀에게서 유목은 “물리적 이주를 거듭하는 상태에 관한 단어가 아니라 정신적인, 영혼의 여행에 대한 단어”로 인식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어린 시절, 모두 집을 비운 ‘집’에 혼자 남아, 어느 외국의 낯선 땅에서 “들판에 선 꽃나무들 사이를 거니는” 혼자만의 ‘상상 속 여행’을 지속했던 기억을 소환해서 자신의 작업을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이민경의 유년기 체험은 ‘시간이 이끄는 공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현재까지 ‘앉아서 떠나는 유목’을 지속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고갱의 이 질문은 인간의 ‘지금, 여기’를 성찰하는 존재에 관한 사유를 이끈다. 그녀 역시 이 질문 앞에 서서 작업을 이어 간다. 문명의 등장 이래 인간이 유목과 임시의 거처를 청산하고 정주를 지속하기 위한 ‘지금, 여기’에서의 ‘집’을 짓기 시작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지금, 여기’에 ‘집’을 짓는다. “인간이 공간을 바라보는 시간, 공간 안에서 변화하는 인간, 공간에 비유한 인간 삶” 등을 작업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짓는 집’이라는 우리의 비유에 버금가는, ‘시간이 이끄는 공간’에 대한 성찰을 낳는다. 따라서 이어지는 고갱의 또 하나의 화두, 즉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현재가 이끄는 미래에 대한 질문’이 작가 이민경의 작업에서 자연스럽게 전개되기에 이른다.

II. 시간이 짓는 집 - 거기의 기억

작가 이민경의 작업에서 이처럼 ‘시간이 이끄는 집 혹은 공간’, 그리고 ‘삶이 이끄는 집 혹은 공간’은 조형적으로 크게 4단계를 거치는 과정 속에서 탐구된다. 첫 단계의 작업은 공간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것이며, 둘째 단계는 그 이미지를 공간 모형으로 만드는 작업이고 셋째 단계는 그것을 다시 사진으로 촬영하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대두된 넷째 단계는 실제의 일상 공간에 개입하는 개인적 서사의 연극적 장치가 도입된 작업이다. 이 각 단계 사이에는 흙, 꽃의 자연물과 건축적 폐자재 그리고 반입체 또는 입체로 만들어진 주택 사진 등 ‘발견된 오브제(Objet découvert)’ 및 ‘만들어진 오브제(Objet créé)’가 그녀의 ‘공간 풍경’ 속에 개입하기도 한다. 첫째부터 셋째 단계는 하나의 완성된 작업에 이르는 과정을 범주화한 것이라면, 마지막 넷째 단계는 새로운 시리즈를 여는 작업의 시발점으로 분석된다. 이번 개인전에서 이러한 단계적 작업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이번 개인전에서 전시장의 첫 동선에 놓인 것은 〈Sunlight in a bedroom〉(2018)이라는 제목의 사진 작품이다. 하얀 문이 반쯤 열려 있고, 꽃들이 훤히 보이는 단순한 모양의 창문이 있는, 그야말로 장식 없는 단출한 ‘빈 방’의 침실 풍경이다.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그것이 ‘공간 모형(Spatial model)’이라 불리는 미니어처를 촬영한 사진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실제의 방과 인테리어를 촬영하고 그 사진을 부분별로 잘라 단순한 공간 모형 속에 실제의 형태로 재배치하고 다시 촬영해서 만든 이전의 사진 작업들, 즉 〈Foreign Home〉(2005-2009)이라 불리는 방 시리즈, 〈White Wall〉(2011~ )이라는 제명의 미술관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이다. 즉 상기의 침실 풍경은 창문을 통해서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실제 대상의 사진 촬영 - 공간 모형 작업 및 콜라주와 오브제 설치 - 모형 내부 재촬영’의 단계를 거친 ‘연출 사진(making photo)’인 셈이다.

그녀는 왜 ‘콜라주나 오브제가 연동되는 공간 모형’을 만드는 방식으로 ‘연출 사진’에 천착하는 것일까? 그녀는 답한다: “저는 공간을 원래대로 재현해 내기보다 공간의 인상을 기억해 내는데 더 애를 씁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방법적으로는 공간 모형을 만들어 이미지로 남기고, 또 다른 작업에서는 오브제도 공간 풍경 가운데 개입시킵니다.” 그녀의 작가 노트에서 우리는 ‘공간의 인상에 대한 기억’, ‘공간 모형을 통해 생산한 이미지’, ‘오브제가 개입된 공간 풍경’ 등의 개념을 추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의 인상 = 이미지 = 기억’, ‘공간 모형 = 물질적 이미지’와 같은 개념항들로 분석된다. 즉 우리는 그녀의 작업에서, 공간에 대한 탐구라는 것은 ‘기억’의 존재처럼 시간이 이끄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임을, ‘이미지’라는 것은 ‘공간 모형’처럼 물질로 인식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베르그송(H. Bergson)의 철학에서 언급하는 이미지론과 연동된다. 베르그송에게서 이미지란 ‘기억의 표상’이다. 즉 존재의 본성이기보다 ‘시간에 따른 존재의 양상 혹은 양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란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드러나거나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matière)로서 나타난다. 즉 “물질은 이미지들의 전체”이자 물질로 된 이 세상은 이미지들의 총체인 것이다.

보라! 위의 작업에서 그녀의 ‘공간 모형’은 다음처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햇빛이 비치는 침실의 이미지’는 곧 나의 ‘거기에 대한 기억’ 곧 ‘거기의 기억’이 소환하는 이미지이며 그것은 공간 모형물처럼 ‘물질의 존재’임을, 그리고 그 이미지는 존재의 본성이기보다 ‘시간과 연동되어 변모하는 운동성의 존재적 양태’라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녀의 ‘공간 모형’을 기초로 제작된 사진 작품 〈Sunlight in a bedroom〉을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겠다. 그것은 ‘시간이 짓는 집’이자 작가 이민경의 ‘거기에 대한 기억’을 물질적 이미지로 소환하는 작업이다.

 

III. 시간이 자라는 집 - 여기의 지속

전시장의 다음 동선을 잇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이번에는 ‘공간 모형’이 아닌 실제의 현실 공간 안에서 각 등장인물이 ‘드로잉이 그려진 입체 종이 가면’을 쓰고 있는 일련의 세 사진 작품들이다. 〈The Boy in Mom's room〉(2018), 〈Bad Dream〉(2017), 〈Misunderstanding〉(2017), 그리고 또 하나는 사진 속 ‘입체 종이 가면들’처럼 실제로 하나의 설치 구조물로 만든 작품 〈Untitled Drawing〉(2018)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퍼포먼스의 분장 도구’이자 ‘만들어진 오브제’이며 또한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이기도 하다.

작가 이민경이 이러한 네 작품을 시리즈처럼 만들어 놓은 까닭은 무엇인가? 작가의 다음의 언급에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 “최근에는 좀 더 인간 삶의 서사가 담겨진 공간에 관심이 갑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따라 일상에서 만나는 공간들이 다른 얼굴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아들과 이웃을 모델로 삶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기록하고 시각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공간 혹은 집’의 거주자인 인간 주체의 삶의 내러티브를 통해 무심해 보이는 공간을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다양하게 변주한다.

작품, 〈The Boy in Mom's room〉은 작가의 어린 아들이 자신의 침대에서 단잠을 깨고 일어난 모습을 담고 있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을 통해서 어두운 공간을 환히 밝히고 있는 가운데 머리에 ‘입체 종이 가면’을 쓰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침대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마치 알과 같은 형상의 ‘종이 가면’은 어린 아들에게는 ‘엄마의 방’처럼 따스한 제 2의 안식처이다. 즉 셸터이자 또 다른 ‘나만의 방’인 셈이다.

한편, 작품 〈Bad Dream〉은 작가의 아들이 어느 날, 악몽을 꾸고 난 후의 이야기를, 또 다른 작품 〈Misunderstanding〉은 작가의 친근한 이웃이 일상에서 겪은 오해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전자에서는 ‘악어에게 물리는 악몽을 꾸고 일어난 꿈 속 이야기’를 드로잉으로 옮긴 가면을, 후자에서는 이웃들의 오해로 인해 변화에 직면한 ‘한 이웃 여인의 섬세한 내면의 심리’를 담은 가면 이미지가 등장한다. 아들과 이웃 여인이 각각 뒤집어 쓴 이 가면 역시 그들의 꿈속과 현실에서의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피신케 하는 셸터이자, 작가의 위무(慰撫)로 가득한 그들만의 방이 된다.

실제로 ‘만들어진 오브제’ 또는 ‘설치적 조각’인 〈Untitled Drawing〉은 또 어떠한가? 작품 내부에 상반신을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이 작품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할 수 없는 ‘거기에서의 상처’를 망각하게 만들고 잠시나마 ‘여기에서의 위안과 치유’를 받게 만드는 ‘관객을 위한 셸터’가 된다. 이처럼 네 작품 모두 이미지의 존재 양상과 그 안에 함유된 내러티브는 각기 다르나 모두 일련의 ‘거기에서의 고통의 경험’을 ‘여기에서 위무하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 작은 셀터인 그녀의 ‘입체 종이 가면’은 ‘여기’로부터 ‘거기’를 이야기하고 치유하는 ‘시간이 자라는 집이자 공간’이다.

필자의 ‘시간이 자라는 집’이란 작명은 ‘삶의 시간(temp de la vie)’과 함께 연동하는 베르그송의 ’지속((Durée)‘이라는 철학적 시간 개념을 빗댄 하나의 은유가 된다. ‘지속’이란 측량이 가능한 추상적, 과학적, 수학적 시간과는 다르다. 즉 캘린더의 순환적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화되어 있지도 않다. 일테면 서울과 파주 사이의 거리를 자동차 속도로 환산한 시간과는 다른 것이다. 다만 지속은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섞여 있는 순수한 시간(durée prurifiée)”이다. 순수한 시간? 그것은 언제나 ‘지금의 시간과 여기의 공간’이 함께 맞물려 작동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삶의 체험적 시간(durée vécue)이자 인생의 시간(durée de la vi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처럼 과거로 돌이갈 수 없고 끝없이 미래로만 흘러가는 비가역적(irréversible) 시간이다. 따라서 과거의 시간은 기억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 불려와 우리와 만날 따름이다.

그렇다. 이민경의 짓는 집은 삶의 시간인 ‘지속이 사는 집’이다. ‘거기’의 기억을 ‘지금, 여기’에 물질적 이미지로 소환해서 지속적으로 질문하는 작업이다. 아들의 악어 꿈을 소환해서 치유하며, 이웃 여인의 고단했던 과거를 지금, 여기에서 서로 나누는 작업이다. 그녀가 탐구하는 집(혹은 공간)이란 ‘삶의 시간이 자라는 집이자 공간’인 셈이다.

 

IV. 시간이 사는 집 - 헤테로토피아

다음 동선을 잇는 작품 〈Research for collecting in mundane life〉(2018)이 진술하는 ‘평범한 일상의 삶(mundane life)’은 자신의 작업이 베르그송의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사는 집임을 드러낸다. 그녀의 아카이브로 구축된 ‘일상의 삶’은 바로 ‘지속이라는 시간’이 집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 테이블 위에는 콘크리트와 폼보드로 만들어진 작은 ‘집’ 두 채가 있고 그 맞은편 벽면에는 일상의 시공간이 기록된 사진들이 빼곡하게 자리한다. 이 사진들은 유학 시절부터 알게 된 미국의 친구와 ‘미술가로서의 삶’을 지속하기로 약속하면서 현재까지 주고받은 연락들의 결과물이다. 이 ‘사진 아카이브’에는 서로의 일상에서 맞닥뜨린 풍경 및 사물을 촬영한 사진들이 뒤섞여 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만든 테이블 위 ‘건축물 모형’은 자신의 미국 친구가 찍어 보내온 사진을 조각화한 ‘만들어진 오브제’인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오브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역할은 공간 가운데 담긴 이야기의 한 부분을 드러내는데 쓰이고, 전시에서는 풍경의 인상을 재현해 내는 방법으로 사용됩니다. 풍경은 어떤 특정 풍경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맴도는 공간들에 대한 상징을 펼쳐 놓으며, 마음속 공간에 대한 촉매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 타자의 시각적인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사진 한 장이 작가에게 강렬한 ‘풍경의 인상’ 또는 ‘공간의 인상’을 만들어낸 셈이다.

지속의 시간 속에서 타자의 경험을 빌려 구축한 작가 이민경의 아카이브는 시뮬라크르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마음속 공간’이 된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M. Foucault)가 언급했던 ‘헤테로토피아(Les hétérotopies)’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 개념은 다른(hétéro)과 장소들(topies)의 합성어로 푸코가 유토피아의 상대적 개념으로 제시한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반(反)공간”을 의미한다. 즉 유토피아가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라면, 푸코에게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속 존재 가능한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탐색된다. 그곳은 닫힘과 열림이 공존하는 경계(frontière)를 가진 시간의 단절과 중첩(chevauchement)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관계(relations)의 공간이다. 그러한 예로 우리는 지식욕을 만족시키는 도서관과 박물관, 일상을 탈출시키는 놀이공원, 여행지 그리고 축제들을 거론한다. 즉 헤테로토피아는 ‘한시적으로 유효한 유토피아’와 같은 푸코의 ‘이론적인 공간 실험’인 셈인데, 베르그송의 삶의 시공간이 작동하는 ‘지속’에 반(反)하는 까닭에 브르디외(P. Bourdieu)를 빌어 극단적으로 말하면 쾌(快)를 지향하는 변형된 ‘상징 공간(espace symbolique)’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고 싶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지금, 이곳’의 현실계에 정말로 있다고 말이다. 헤테로토피아가 오늘에 남기는 주요한 개념이 바로 ‘위안을 주는 현실 속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민경의 작품에서 이러한 헤테로토피아는 도처에 있다. 꼬마의 ‘입체 종이 가면’도 그러하고 그녀가 자주 찾는 일상 속 허름한 공사장 풍경도 그러하다. 심지어 실제로는 가보지 못했으나 외국에서 보내온 친구의 사진 속 풍경 속에서도 헤테로토피아는 살아 숨을 쉰다. 작가 이민경은, 작업을 통해서 야훼가 약속했던 ‘더 나은 본향(히브리서 11: 16)’을 ‘지금, 여기’에서 찾기를 기대한다. 필자가 그녀의 아카이브 작업을 ‘시간이 사는 집’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에필로그

작가 이민경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거기에 있지만 항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들에 대해’ 성찰한다. 그것은 신이 약속한 ‘더 나은 본향’을 성취하는 ‘현실 속 다른 공간’인 ‘헤테로토피아’이거나, 그것을 성취하기를 기대하는 ‘지금, 이곳’에서의 일상의 삶이다.

그녀는, 시간이 이끄는 공간을 기록하고, 쪼개고 재구축하는 일련의 사진 작업을 통해서 ‘앉아서 떠나는 유목’을 실천하는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펼쳐 왔다. 이렇듯 열정으로 달려왔던 그녀가 맞닥뜨린 현실적 고민은 많다. 이러한 고민을 예술의 언어로 되돌아보고 성찰하면서 해결의 조짐을 모색하는 이번 개인전은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작업 전반(全般)을 점검하고 작가 스스로 자신을 객관화, 타자화한 ‘한 예술가’의 작업 전반(前半)을 정리해 보는 장이 된다.

그것은 전시장의 마지막 동선 끝에 있는 사진 작품, 〈Who is it!〉(2018)이 던지는 시각적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그것은 기대와 희망으로 혼재된 설렘이다. 보라!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한줄기 빛과 파란 문! 자신의 집 복도를 촬영해서 ‘공간 모형’으로 구축하고 그것의 내부를 다시 촬영한 그녀의 사진 작품에는 정적을 깨는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작가가 질문을 던진다. 그 ‘누군가’는 정작 자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작가 이민경일 수 있다. 그녀는 안다. 그래서 ‘물음표 없는 느낌표의 질문’을 던진다. 호기심 가득한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다는 듯이 말이다. “누구세요!” ●